아침 7시에 겨우 일어났다. 전날 밤에 하고 싶은 아이디어들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당차게 계획한 일들을 실천해야 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을 뿐인데 몸이 뻐근하고 더욱 둔해진 것 같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잔머리는 집게핀으로 고정했다. 평소보다 더 얼굴이 동그란 느낌 적인 느낌. 매번 자정 이전에 잠이 들자 하고선 자정을 아슬하게 넘기고 잠에 든다. 줄어드는 수면시간에 당연히 얼굴은 퉁퉁 붓는다.
드디어 오늘은 빨래를 할 수 있겠다! 창문을 활짝 열어 차가운 아침 공기를 방 안으로 들였다. 볕이 제법 가을 햇살 흉내를 낸다. 아직 늦여름 인주제에. 날이 더워 급히 꺼내놓은지 두어 달 정도밖에 안된 얇은 옷들... 이제는 깨끗이 빨아서 정리함에 넣어 정리해야 한다. 요 며칠 날씨가 영 내 계획에 협조적이지 못하다. 비바람에 습한 바람이 불었다. 이런 날 빨래 널다간 냄새 날라. 그 대신 미리 빨래를 색상 별로, 소재 별로 빨래망에 넣어 분류하고, 하얀 옷가지들은 얼룩제거용 비누로 부분 애벌빨래를 해서 미지근한 물에 과탄산 수소를 푼 물에 담가 불려 놨다.
빨래 바구니 들고, 세탁기를 돌린다. 그 사이에 아침 운동을 간다. 이제 두어 달 정도 다닌 것뿐인데 이 조깅 루틴이 몸에 많이 익숙해졌다. 어쩌다 한 번씩 권태가 느껴질 때면 집에서 더 가깝고 짧은 루틴으로 가기도 하는데, 이상하게도 더 멀고 험한 이 평소 루틴이 더 짧고 편하게 느껴진다. 뛰다가 걷다가 어느덧 한 동산 정상에 오르면 스트레칭을 한다. 예전은 7시였는데 이제 해가 늦게 뜨는 만큼 동산 정상에 오를 즈음은 8시 되기 조금 전이다. 맨 처음 조깅을 시작할 때, 정상을 6시에 찍어보자고 목표했는데, 아마 그건 내년, 다시 해가 길어질 때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 55분 정도 걸리는 운동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세탁실이 있는 복도 끝에서 청소 아주머니가 물걸레질을 하고 계신다. "모오겐!" 눈이 마주치지도 않았고, 인사를 나누기에는 거리가 멀었지만, 밝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운동을 다녀와서 좋기도 하고 날씨도 좋고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니까.
아주머니도 경쾌하게 답해주셨다.
"모오겐!"
전자레인지에 돌린 냉동밥 그리고 주말에 남은 채소와 버섯으로 만들어둔 하이라이스를 데웠다. 쓱쓱 비벼 먹으려다가 캔 옥수수와 파마산 치즈를 토핑으로 올려 먹었다. 궁금해서 샀던, 아몬드 밀크향이 나는 홍차가 입가심에 딱이다. 딱!
고소하고 달달한 향에다가 살짝 떫떠름한 홍차가 너어어어어어어무 좋다. 아침에 특별한 차를 마시는 이 여유, 엄청 럭셔리하다. 크으
슬슬 나갈 준비를 한다. 검정 반팔티, 검정 청바지가 너무 어두운 것 같아서 회색 옥스퍼드 셔츠를 걸쳤다. 역시나 너무 독일스러운 것 같은 패션이다. 안 되겠다. 코인 목걸이를 했다. 스스로의 기준으로 그나마 봐줄 만하다. 그리고 선크림도 발랐다. 독일에선 한국과 달리 비교적 나갈 준비가 너무 간편하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씩 선크림을 바르고 나가면 나름 외모에 신경 쓴 날이다. 참, 집을 나설 때, 청소 아주머니와 또 마주쳤다. 또 인사했다. 이번엔 "할로!" 아주머니가 나를 못 알아 보신 것 같았지만, 아까 인사 안 했으면 스스로 인사하기 더 어색할 뻔했다.
걸어서 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슈퍼마켓이 있지만 오늘은 조금 더 집에서 먼 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껏 해야 버스 대여섯 정거장 거리지만. 일부러 조금 거리 있는 곳에 갔다. 왜냐하면 버스를 타는 이동시간에 이제 5분의 1 가량 남은 소설 <종이 여자>을 읽어야 하니까. 집에 있으면, 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생각이 나고, 잡생각들이 멈추지 않는다. 속 시끄러운 집을 떠나야 이제야 독서를 할 마음의 준비가 겨우 된다.
무화과 잼 재료를 살 거다. 요즘 자주 보는 유투버 <아미요>에서 말했던 재료 그대로. 타임, 꿀, 레몬.... 그리고 무화과가 재철을 맞아서 세일을 한다. 내 주먹만 한 무화과가 한 알에 25센트. 건너편 칸에서는 대추 토마토가 세일한다. 작은 종이상자에 나누어서 빨간 글씨로 0.44 유로, 종이 한 상자에 44 센트. 세일인가 싶어 두 상자를 집었다. 계산하고 보니 100그램에 44센트였다. 뭐 그래 봤자 400그램 남짓 샀다. 무화과 보다 토마토를 더 비싸게 샀다.계획하지 않은 소비에 잠시 괜한 죄책감이 들었지만, 막상 집에 와서 먹어 보니 이게 웬걸, 꿀 바른 토마토처럼 달다. 다음에 또 사 먹을 것 같은데?
아침 내내 무화과 잼을 만들면서 채사장 유튜브를 들었다. 1992년에 있던 로드니 킹 에 관련된 이야기다. 그 시대에도 역시나 인종차별의 사건들은 예민하게 받아들여졌지만, 다듬어지지 못한 방법으로 다루어진 것 같다. 그 시대의 나름 최선이었겠으나, 참 아쉬운 처세로 훗날 기억되는 것은 안타깝다. 또 한편으로는 인종차별 사건들은 여전히 예민한 주제이자 절대적인 정답을 찾지는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달구어진 잼을 한 시간 정도 저었을까, 생각하기가 조금 지겨워질 때쯤, 무화과 잼이 완성됐다. 기대한 것보다 너무 맛있었다.
가까운 곳으로 가서 빵을 샀다. 치아바타 같은 빵을, 두껍게 잘라 토스트처럽 굽고 그 위에 무화과잼을 올려먹었다. 루이보스차와 같이 먹었다. 너무 오랜만에 시간들이고 공들여서 직접 만든 쨈이 참 맛있었다. 타임 향이 상쾌하고, 라임향이 상큼하고 무화과의 달큼한 맛이 참 잘 어울렸다. 특히 무화과 씨들의 톡톡 터지는 식감 때문에 더 먹는 재미가 있었다. 참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는데, 혼자 먹기가 너무 아까웠다. 조금 외롭기도 하고. 내일 옆 빌딩에 사는 해인이 조금 나누어 줘야지. 전화로 아버지께 자랑 아닌 자랑을 했는데, 더 외로워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밥은 혼자 먹으면 별로다.
오후에도 계속 채사장 유투버를 팟캐스트처럼 들었다.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몸도 늘어지게 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침부터 분주하게 보내서. 피곤이 몰려왔었나 보다. 역시 너무 힘을 주면 금방 지치게 되는 것 같다. 아님 카페인 금기 현상인가. 쨋든 급 방전. 아침에 로드니 킹 이야기에 대해 들었는데, 오늘 책 <종이 여자> 읽다가도 로드니 킹 이야기가 나왔다. 신기하고 또 이렇게 배우고 아는 재미를 찾았다. 배가 불러서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싫어서, 허기가 가시는 정도로만 끼니를 챙겨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자주 배가 고팠다. 하지만 저녁에 배부른 건 더 싫어서 요거트 하나만 먹어야겠다.
내일도 여전히 운동과 듀오링고를 하겠지. 그리고 오후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 <종이 여자> 도 다 읽을 것 같다. 사춘기 시절 이후로 담쌓았던 로맨스 소설을 읽느라 온몸이 오그라들지만 그런 간지러운 느낌도 이젠 있는 그대로 받아줄 만하다.
평소 플래너에 하루 계획과 일과를 단어로 정리하는데, 오늘은 이렇게 블로그에 정리해 둔다. 하루의 일상을 문장으로 남기는 것도 좋은 글쓰기 연습인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부터 자기 전까지 했던 기억 하면서 생각 정리도 하는 게 꽤 재미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머리가 막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글쓰기 속도가 내가 머리 돌아가는 속도를 못 따라오는 듯 하지만. 오늘 하루를 나름 디테일하게 적어보는 연습도 나쁘지 않네. 비록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만, 어쩌다 가끔 일상을 정리하고 생각도 대청소가 필요한 듯하다.
'일상 내공 쌓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어 주기도문] Das Vaterunser | 한영 번역 포함| The Lord's Prayer - The Our Father (1) | 2021.02.05 |
---|